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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이야기

조선 태종의 즉위, 업적 및 소회

by 옆차기왕 2023.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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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궁궐의-수문장
[출처 : Pexels - Jakob Jin]

조선 태종의 즉위 과정과 업적

태조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던 이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하여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 조선을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는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 씨의 소생인 여덟 번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결정하였다. 이에 대해 이방원 등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 씨의 소생들의 불만이 높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1398년 정도전 일파에 의하여 요동 정벌론이 대두되었다. 군사력 확보를 위해 사병이 혁파되어야 하며, 병권은 국가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다섯 번째 왕자인 이방원은 자신의 세력 기반인 사병이 혁파될 위기에 놓이자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세자 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일곱째 아들인 방번을 함께 제거하였다. 
이에 태조 이성계는 극히 상심한 나머지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이는 조선의 제2대 왕 정종의 즉위이었다. 
그리고 1400년 이방원이 동복형인 방간의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뒤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400년 11월 마침내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태종 이방원이 즉위하자 이방원에 대한 증오심으로 한양을 떠나 함흥에 머무르면서 이방원이 문안을 위해 차사를 보내면 그때마다 죽여버려 '함흥차사'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 
태종은 고려 잔재 청산, 국방 강화, 조세제도 및 노예제도 정비, 신문고 설치(민심 수습), 호패법 실시 등 국가 전반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고 조선의 안정을 위한 정책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세자 시절부터 추진하였던 이러한 개혁 정치는 1418년 그가 상왕으로 물러날 때까지 지속되었고, 이러한 개혁에 힘입어 세종 대에는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태종에 대한 소회

태종 이방원은 야심이 크고 능력이 출중한 인물로 만약 그가 야심을 속으로 삼키고 벌어진 상황에 순응하였다면, 즉 왕자의 난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조선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왕조의 기틀을 잡는데 한참이 걸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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